안중근(安重根, 1879. 9. 2 ~ 1910. 3. 26)
동아시아를 손아귀에 넣으려는 일본 제국의 야욕이 한반도를 거지반 잠식했던 1909년 10월, 일제의 한반도 합방을 주도적으로 추진하고 있던 일본의 전 총리이자 초대 조선 통감, 추밀원 의장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는 장차 일제의 영토가 될 만주 순방길에 있었다.
이미 그는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강제 양위시켰고, 1905년 을사조약에 찬성했던 을사 5적(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송병준)을 중심으로 한 친일 내각을 수립하는 등 대한제국을 뿌리채 흔들고 있던 참이었다. 이번 순방 역시 중국 침략에 앞선 한반도 합방에 대한 러시아 제국의 의사를 타진하기 위한 성격이 강했다. 이와 같은 행보로 이토는 조선 및 중국에서 침략의 원흉으로 여겨졌고 온 국민의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1907년 의병 활동에 투신한 뒤 연해주에 있던 안중근 역시 끓는 분노를 참지 못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 내린 이토 히로부미(5번 인물)>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을 결의한 안중근은 그 해 10월 26일, 이토가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와의 회담을 위해 하얼빈에 당도하는 때를 거사일로 정하고 우덕순(1880~1950), 조도선(1879~?), 유동하(1892~1918) 세 동지와 함께 하얼빈으로 향했다. 우덕순 외 두 명은 하얼빈 전의 채가구와 창춘 역에서 때를 기다리고, 안중근 자신은 이토가 하차할 것이 확실시되었던 하얼빈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26일 아침 9시 30분, 채가구와 창춘을 지나친 이토가 하얼빈 역에 내리는 순간 안중근의 권총이 불을 뿜었고, 3발이 이토에 명중하여 30여분 만에 이토는 '바보 같은 놈!(ばかやろう)'이라는 말을 남기고 저 세상으로 갔다. 거사가 성공한 후 안중근은 러시아어로 '대한국 만세(Корея! Ура!)' 라 외치며 의연하게 체포되었고 이듬해인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언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장렬히 순국하였다. 다른 세 동지 역시 역에서 검문에 의해 체포되었으나 사형은 면했으며, 수 년간의 옥고를 치른 뒤 세 명 모두 독립 운동에 투신한다.
대인배였던 안중근 의사는 죽음을 앞둔 옥중에서도 의연한 태도와 흔들림없는 몸가짐으로 일본 간수를 여럿 감동시켰으며,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친다'와 같은 명 문장이 가득한 친필 유묵도 여러 점 남겼다.
안 의사의 순국 후 5개월 뒤 한반도는 결국 일본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이후 36년 간 우리 민족 최악의 암흑기가 시작되었다. 일각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거사로 인해 조선 식민지화에 다소 온건적인 태도를 보였던 이토가 죽으면서 한일 합방이 앞당겨졌다는 분석도 있으나 정확한 것은 아무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순국 전 '유해는 고국으로 꼭 반장해 달라'고 유언했던 안중근의 유해는 지금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2008년 3월 안 의사가 순국한 장소였던 뤼순 감옥 뒷산에서 유해 발굴 작업이 있었으나 실패했고, 현재 북한과의 접촉을 통해 유해 수색 및 발굴 작업을 진행하고는 있으나 그리 신통치는 않은 모양. 뤼순 감옥 터에는 지금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다 하니 정말 안 의사의 유해를 찾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1962년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으며 한동안은 거의 잊혀지다시피 하며 홀대받았으나 광복 60주년을 맞은 2005년부터 활발히 재조명되기 시작, 올해는 거사 100주년을 잊지 않고 기념하는 움직임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니, 안 의사도 지하에서 얼마간은 편히 쉬실 수 있으리라. 어서 빨리 유해를 찾아 와야 할 텐데..
아무쪼록 그 어려운 시기, 목숨을 버리는 큰 결단으로 올바름이 무엇인지, 정의가 무엇인지를 온 세계에 깨우쳐 주었던 안 의사의 의로운 거사에 다시 한번 머리 숙여 존경과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감사합니다. 편히 쉬십시오.